As Kuhn proposed, our propositions about the world are embedded within paradigms, roughly a network of interrelated commitments to a particular theory, a conception of a subject matter, and methodological practices.
Kuhn이 제안했듯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명제는 ‘패러다임,’ 즉 특정 이론, 주제에 대한 개념, 그리고 방법론적 관행에 대하여 상호 연관된 약속의 네트워크 안에 깊이 박혀 있다.
인강 선생님이라면? 완강률이 어떻게 나왔는지, 어느 구간에서 이탈했는지가 그 틀이 돼. 완전히 다른 네트워크인 거야. 이 틀 자체를 패러다임이라고 해.
Thus, when scientists undertake research, they do so from within a specific paradigm.
따라서 과학자들이 연구를 수행할 때, 그들은 하나의 특정한 패러다임 안에서 그렇게 한다.
자기 틀 안에서만 판단하는 거야. 과학자도 마찬가지야. 자기가 갖고 있는 패러다임 안에서만 연구하고 해석하는 거야.
Even the most exacting measurements are only sensible from within that paradigm.
가장 엄밀한 측정조차 오직 그 패러다임 안에서만 사리에 맞는 것이다.
반대로 완강률 58%, 재시청 집중 구간 3분 27초라는 정밀한 데이터도, 전통 강의 선생님한테는 읽히지 않아. 아무리 정밀한 측정도 그 틀 안에 있는 사람한테만 의미가 있는 거야.
For example, a look into a microscope tells you nothing unless you are already informed about the nature of the instrument and what you are supposed to be looking at.
예를 들어,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도구의 성격과 여러분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근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거야. 이 선생님한테 “잘 가르치고 있다”의 기준은 학생 표정·손·분위기거든. 그 틀 안에서는 완강률 58%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3분 27초 재시청이 어떤 신호인지 읽히지 않아. 도구가 눈앞에 있어도, 그 도구를 해석할 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Thus, what we call major progress in science is not a movement from a less to a more accurate paradigm.
따라서 우리가 과학에서 주요한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덜 정확한 패러다임에서 더 정확한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냥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거야. 어느 쪽이 더 정확하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Rather, it is a horizontal shift from one ‘way of seeing the world’ to another.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수평적 전환이다.
“학생 표정으로 수업을 읽는 방식”에서 “완강률과 재시청 데이터로 수업을 읽는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렌즈로 갈아끼우는 거지.
For Kuhn, ‘the scientist with a new paradigm sees differently from the way he had seen before.’
Kuhn에게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닌 과학자는 자신이 이전에 보아 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본다.’
같은 수업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는 거야.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과학자도 똑같아. 같은 실험 결과를 보면서 전혀 다른 걸 보게 되는 거야.